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네 명의 할머니들이 자식 자랑으로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할머니 왈 “우리 아들은 교회 목사라우. 남들은 우리 아들더러 오~고귀한 분! 그러지”. 두 번째 할머니가 나섰습니다. “그려? 우리 아들은 추기경이유! 남들은 우리 아들더러 오~거룩한 분! 그러데유!”. 세 번째 할머니는 “워매~ 우리 아들은 교황인디! 남들은 내 새끼더러 워매, 워매~ 고결한 양반! 그런당께! 이젠 그 이상 더 높은 사람은 없제?” 하면서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네 번째 할머니가 특별히 자랑거리가 없는 아들 때문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윽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걸 우짜노. 우리 아들은 숏 다리에 곰보에다가 뚱보에 정말 못생기기까지 하니 말이라. 그래도 누구든지 우리 아들을 보는 순간 한 결같이 하는 말이 있는기라! 그기 뭔지 아나?”, “Oh My God!” 하더랍니다. 네 번째 할머니가 하나님이란 단어를 쓴 것은 감히 그 누구라도 자기 아들을 능가할 자가 없다는 최상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의 자랑이 헛되기 짝이 없음을 풍자하고자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정학진 목사의 [축복과 사명의 차이]라는 글입니다. “모야모야병을 앓고 있는 15세 소년의 투병기를 지켜보다가 울었다. 문득 건강한 것은 축복이 아니라 거룩한 부담이다. 사명임을 깨닫는다. 곰팡이 냄새나는 지하교회 서너 명 교인이 전부인 셋방 교회에서 월세 내는 날을 두려워하는 미자립 교회가 존재하는 한 더는 예쁜 건물, 거창한 건물은 축복이 아니다. 부담이다. 사명이다. 뼈까지 달라붙은 쇠꼬챙이 같이 마른 몸을 하고 목마른 눈초리로 쳐다보는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저 어린 것들이 있는 한 하루 세끼 따박따박 먹는 것은 더는 복이 아니다. 부끄러움이다. 잘 먹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할 일이 아니다. 잘 먹게 되어 죄송하다고, 우리만 잘 먹는 게 못내 죄송하다고 내가 가진 걸 나눌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가슴 아파 울고 있는 교우가 있는 한 더는 내 자식이 건강하게 자라는 게 복이 아니다. 남들보다 앞서고, 칭찬 거리가 많은 게 자랑이 아니다. 입 다물고 겸손히 그분의 은혜를 기억해야 할 일이다.”
나 자신을 돌아볼 때 어떻습니까? 부질없는 자랑 속에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깨닫고 보면 헛되고 부끄러운 자랑이지 않습니까?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31).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에).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들이 다 지나가는 임시적인 것들이요 별거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랑할 것이 뭐 있겠느냐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무엇을 자랑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부질없고 헛된 것이 아닌 죄와 헛된 삶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나를 살려주신 예수님과 예수님이 전하여준 구원의 복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 삼으신 것은 죄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요, 인간을 불행과 비극을 가져다주는 굴레에서 건져내기 위함입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내가 죄로 죽어가는 사람, 불행과 비극으로 치닫는 사람들을 일깨우며 인도하는 일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일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일이 나의 본업이고, 세상에서의 생업은 부업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생명과 건강과 능력과 일터와 재물 등을 주신 것은 영혼 사랑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다한 사람 중에서 나를 먼저 부르신 것, 부업인 생업을 주시고, 내게 이것저것 많은 것을 주신 것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가장 중요한 본업인 영혼 사랑과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육신이 죽어 죽음의 관문을 통과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가게 마련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가장 중하게 여기시는 것, 인생을 다 산 후에 최종 남는 것을 들라 하면 얼마만큼 참되게 사랑했으며, 타인을 구원의 길로 안내했느냐라는 것입니다.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롬 12:15~16). 이 말씀을 두 글자 한마디로 표현하면 “공감(共感)”입니다. 공감을 달리 표현하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됩니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처신했다는 것은 공감했다는 것, 눈높이에 맞추었다는 것이요, 내 관심사가 아닌 상대방의 관심사에 맞추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감의 대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을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이 겪는 희로애락(喜怒哀樂),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실상을 완전하게 아십니다. 예수님이 사람 몸을 입었다는 것은 인간을 100% 아시고 공감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기에 인간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부업인 생업을 갖고서 공감 곧 눈높이 맞춤으로 본업인 영혼 사랑과 구원의 사명을 놀랍게 이룰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