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온 가장 근간을 이루는 신학의 주류(主流)요 대종(大宗)이다. 따라서 참된 기독교는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 전통적 정통신학이다. 그러므로 개혁주의 신학은 여러 신학 중의 한 지류, 혹은 한 갈래의 신학이 아니라 바로 기독교 자체, 참된 기독교 신학임이 명백하다. 개혁주의는 성경주의이고, 또 그것은 특별히 성경적 성경주의(Biblical Biblicism)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교회를 보라! 하박국적인 믿음과 성경에서 요구하는 원색적인 믿음이 얼마나 있는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하).

▲ 역사(History)
(1) 역사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은 그 기원을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근본원리들은 이미 쯔빙글리의 사상 속에 표현되어 있었으나 칼빈의 심원하고 예리한 해석을 통해서 비로소 최종적인 형식을 갖추게 되었고 또한 조직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사상적 특징은 성서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 성찬의 영적 해석 그리고 의회식 교회정치체제 등이다. 스위스로부터 칼빈주의는 프랑스, 화란, 지금의 체코슬로바키아인 보헤미아, 헝가리, 영국 그리고 마침내는 미국과 온 세계에 퍼져 나갔다.

(2) 제네바의 종교 개혁자 칼빈(John Calvin, 1509 - 1564)을 통해서 이해된 성경교회 사상 체계가 개혁파 교회들에 의해서 채택된 공적 신앙 고백들과 칼빈을 따르는 대표적 신학자들의 고전적 저서들을 통해서 개혁주의 신학은 발달하였다.

(3) 개혁주의 신앙 고백서들은 그 수가 30을 넘지만 신조적 권위를 가지고 널리 채용된 것을 보면, ① <제2 스위스 신앙 고백> (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4년 불링거(Bullinger)가 기안하여 스위스, 폴란드, 항가리, 스코틀랜드, 그리고 프랑스의 개혁파 교회들이 신조로 채용 ②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 (Heidelberg Catechism). 1562년 울씨어스(Ursinus)와 옴레비아너스(Olevianus)가 작성하여 도르트 대회(The Synod of Dordt, 1618 - 1619)에서 동의를 얻고 독일, 화란, 미국의 개혁파 교회들이 교회 표준서로 채용, ③ 그 외에 영국 교회의 39개조신고, 개혁파 교회 세계 대회인 도르트 대회에서 채택한 도르트 신경(The Canons of Dordt)이 있고, 웨스트민스터 회의(1644 - 1647)에서 작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과 그 대소요리 문답> (The Wes- tminster Confession with Larger and Shorter Catechisms) 등이 있다.

(4) 이렇게 4세기 동안 개혁주의 신앙을 설명하려고 하였던 많은 학자들의 능력, 학문, 이해가 다양하고 각자의 견해차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신학의 큰 흐름은 조금도 손상없이 그대로 흘러서 쯔빙글리와 칼빈으로부터 찰머스, 커닝햄, 크로포드, 하지, 돈웰, 쉐드, 워필드, 코이퍼, 바빙크, 메첸 등으로 계승되어 왔다. 오늘날 화란에서는 도예벨트, 벌카우어, 그더보스 등이 대표적인 개혁주의자로 꼽히우고 미국에서는 이미 작고한 벌코프, 존 머레이, 에드워드 영, 반틸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 사상 (Thought)
개혁주의의 근본 사상을 다음 3가지에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다.

(1) 객관적으로 말해서 기독교 유신론(有神論)이다.
유신론은 하나님의 계획이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만이 만물의 궁극적 원인됨을 인식하는 우주의 목적론적 관점에서 참된 유신론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2) 주관적으로 말해서 가장 순수하고 고상한 종교이다.
종교적 관계가 그 순수성을 가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태도가 행동, 말, 기도에서 확증될 것뿐만 아니라 생활과 지적, 감정적 실천의 모든 활동을 통해서 행해져야 한다.

(3) 구원론적으로 말해서 복음주의적이다.
복음적 종교는 오직 죄악 된 영혼이 유효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하고 직접적인 근원이 되는 은혜의 하나님께 겸손히 그리고 순수하게 의지하고 쉼을 얻을 때만 완전히 이뤄지는 것이다.
개혁주의자는 모든 현상 뒤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며 모든 발생사(發生事)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그의 손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의 구원의 모든 역사에서 자아 신뢰의 모든 흔적을 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자신을 맡기는 자이다.

▲ 표어(Slogan)
개혁주의자들에게는 주창한 다섯 가지의 큰 슬로건(Slogan :표어와 함성)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앙노선이요, 우리가 본받고 힘써 따라가야 할 믿음과 생활의 내용이 되는 것으로 확신하는 동시에 그 집약으로 본다.

(1)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개혁주의 신앙과 바른 신앙생활이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생할을 뜻한다. 어리석은 헤롯 왕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가 가로챘다. 그 결과 그는 충이 먹어 죽었다(행12:23)
성도의 삶은 그 삶의 전역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그 중심과 목적을 두어야 한다. 사업을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예배를 드리든지 기도를 하든지 선행이든지 심지어 먹든지 마시든지 일체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고전 10:31 참고). 신앙이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생활하는 것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2)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우리는 성경이 가는데까지 가고 성경이 머무는 곳에는 우리도 머문다.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 말하고 침묵하면 우리도 침묵한다. 절대로 성경 말씀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성경은 완전 영감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66권 신구약 성경 말씀밖에는 다른 말씀이 있을 수가 없으며 이 말씀은 부족하거나 과다하여 남지 않는다.
인류 구원 역사에 완전 충족한 계시로 완성된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경 말씀만을 붙들고(빌 2:16), 생명의 말씀을 밝혀(주 : 밝힌다는 말씀의 본 뜻은 굳게 붙잡다. 굳게 소유한다), 상고하고(요 6:39), 마음속에 받아들이고(행 7:11), 그 말씀을 행하므로(약 1:25)살아간다. 우리는 말씀을 상고하여 머리로 깨닫고, 그 깨달은 말씀을 마음으로 깊이 믿고, 그 믿는바 말씀을 손과 발로 생활에 실천하여 사는 바른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이 인격적인 신앙이요, 온전한 믿음이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 66권 신구약의 말씀을 모두 믿고 그 말씀대로만 살아야 한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3)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o)
우리에게는 나사렛 예수 한 분밖에는 다른 그리스도가 없으면 믿고 따를 분이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히 3:1) 예수님을 항상 바라보면서 (히 12:2)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벧전 2:21).
참 성도는 예수님 만을 마음에 영접한 자요(요 1:12)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요(요 15:5) 예수님의 소유된 자들이다(롬 1:6, 고전 6:19 - 20). 우리에게는 유대교에서와 같이 앞으로 오실 초림의 메시야도 없고 이단에서와 같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도 없고(고후 11:4) 오직 하나님께서 성육신히시어 오신 나사렛 예수 그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달리시어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려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제 불원시에 심판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밖에는 없다.

(4) 오직 은혜(Sola Gratia)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은혜의 방편과 수단이 서너 가지가 있다. 그것은 말씀과 성례(할례와 유월절이 신약에 와서는 세례와 성찬으로 완성됨)와 기도와 찬송이다. 어느 한 쪽으로만 너무 기울여져도 아니된다. 말씀을 날마다 신령한 양식으로 먹고(마 4:4) 그 말씀 속에서 생활하며 그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기도하며 그 말씀 안에서 찬송하며 말씀과 함게 성찬에 참예하여야 한다. 말슴과 기도와 찬송 중에 그 바탕은 역시 말씀이다. 왜냐하면 말씀 속에 믿음이 있고(롬 10:17) 말씀 속에 마음의 뜨거움이 있고(눅 24:32) 말씀 속에 마음의 뜨거움이 있고(눅 14:4)말씀 속에 가듭남이 있고(벧전 1:23) 말씀 속에 즐거움이 있고(시 119:92, 111) 말씀 속에 기도와 그 응답이 있고(시 119:145) 말씀 속에 삶이 있고(시 119:53) 말씀 속에 성령님과 그 충만이 있기 때문이다(엡 5:18, 골 3:16 비교) 성령님은 언제나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하여, 말씀 안에서, 말씀을 따라서, 역사하시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오직 은혜! 하나님은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오직 그 은혜로만 금생도 내생도 가능하다.

(5) 오직 믿음(Sola Fide)
개혁주의 교회에는 오직 믿음밖에는 없는 것을 선포한다. 믿음만이 우리 생명의 구원 영생이요, 은혜 축복이요, 기도응답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있다고 믿는다. 인간의 노력과 선행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1517년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고 타락한 중세교회를 개혁하였다. 오직 믿음!이란 슬로건은 루터가 가장 높이 쳐들었던 구호였다. 그렇다 믿음으로 구원이요 믿음으로 축복이요 믿음으로 승리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탕이다.
<오직 믿음>! 이 믿음은 구약시대의 하박국 선지자의 믿음이요(합 2:4) 신약의 바울 사도의 믿음이요(롬 1:17) 개혁자들의 믿음이요, 오늘 그들의 뒤를 가는 정통보수주의자들의 믿음이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고 영광을 돌릴수가 있다(히 11:6), 믿음은 가장 좋은 제물이며(빌 2:17) 보화이며(마 13:44) 보배이며(벧후 1:1, 고후 4:7) 금보다 더 귀한 것이며(벧전 1:7) 무기이며 (엡 6:16, 벧전 5:8-9)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 생 활 (Life)
칼빈은 그의 역작 기독교강요 제1권 9장1항에서 밝히기를 “성경을 버리고 무슨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오를 범했다가 보다 광기중에 걸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개혁주의자이면 누구나 성경 말씀을 절대로 등한히 해서는 아니된다.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며 깨달아서 그 말씀을 실제생활에서 행하여야만 한다. 그래야 믿음이 자라나고 생활에의 변화를 가져오며 약속의 말씀을 체험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말씀을 바탕으로 하는 힘쓰는 기도가 없이는 아니된다.
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승복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줄 믿고 값없이 받는 칭의를 확신한다.
② 성경계시 중심의 생활을 한다. 성경외의 전통, 꿈, 영음 등 일체를 배격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중심의 사상이다.
③ 성령을 받아야 한다. 칼빈은 말씀과 성령을 중시했다(기독교강요 3권).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마쳐야 한다(갈 3:3). 신본주의로 시작하다가 인본주의로 마칠 수는 없다.
④ 성경과 말씀과의 관계도 오해해서는 안된다. 좌우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성령은 성경과 더불어(Cum Verbum) 역사한다.
⑤ 개혁주의자는 너그럽다. 칼로 베는 것 같으나 실상은 관대하다.
또 오래 참는다.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개혁주의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다”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고, 하나님은 전부의 전부가 되심을 개혁주의자는 믿는다.

▲ 방향 (Direction)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궤도를 따라 언제나 계속 개혁해가는 교회이다“(Fcclesia reformata ecclcsia semper reformanda).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선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항구적인 모토(motto) 이다.
개혁운동의 도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천군이나 천사들을 동원해서 하루 아침에 개혁을 단행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연약하여 깨어지고 상한 갈대 같은 인간이지만 기름부어 사용하시는 것이다. 참된 개혁은 사람 안에서 일어나고, 사람을 통해 일어나고,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

(1) 먼저는 자신의 개혁부터다.
개혁자는 “하나님 안에서 숨기를 잘 하는 사람,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그 다음 그는 하나님의 나타난 의지인 성경 말씀과 그 말씀이 계시되는 기관인 양심에만 매이고, 또 매이기를 소원한다. 또 자기의 직무에 충성한다. 그는 자기의 직무를 하늘의 소명으로 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자족하고 감사한다. 자족과 감사는 퇴보와 안일의 발판이라기 보다는 모든 것을 초극(超克)하고 관철하고 완성하는 디딤돌이 된다. 그는 자신의 소명에 진실하다. 그 소명감이 확실할 때 사명감이 불탄다. 사명감이 불타는 사람은 불같은 충성을 한다. 모든 칭찬과 비난과 개인의 영광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뜻을 준행한다. 이러한 사람이 진정한 개혁자요, 교회가 찾는 사람이다.

(2) 다음은 가정의 개혁이다.
개혁자들은 갸정생활에 무관심하거나 등안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가 쉽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이다. 루터는 얼마나 다정다감한 아버지였던가! 그는 그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여행 중이었을 때 자녀들에게 편지쓰기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위대한 종교의 교사가 되기 전에, 개혁자가 되기 전에 먼저 가정에서, 고생하는 아내를 위로하는 남편, 어린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자상한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 후에 당신이 교회의 지도자요 기둥이 되었을 때도 온유하고 겸손한 지도자요 개혁자가 될 것이다.

(3) 다음은 신학의 정립이다.
한국교회의 개헉의 방향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 우선 신학의 정립이다. 신학의 진정성은 신학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갔는가 하는 접근도로 측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신학은 전통적 정통신학이다. 신구약과 교회사를 관통하는 신학의 본류를 파지(把持)하는 일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겸손한 태도로 그 정수(Essence)를 배우는 일이다.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신앙체험을 이야기해도 그들의 바가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은 정녕 아침빛을 보지 못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아야 하기 때문이다(사 8:20)

(4) 그리고 윤리의 정립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믿음과 행위를 구별하지 않는다. 믿음은 곧 행함이요, 행함은 곧 믿음이다. 이것을 구분함으로 율법 페기론자(Antinomian)들의 오류에 빠진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은 받으나, 그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으며, 인간의 뜻이나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 믿음으로 이 은혜가 택자의 영혼에 전달될 뿐이다. 그 은혜는 선한 일을 우리 영혼 속에 낳기 때문에 반드시 선행이 수반된다(엡 2:8-10).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신학의 외형은 있으나 윤리의 알맹이가 없다. 날카로운 비판은 있으되 원숙한 이해와 사랑은 없다. 우리가 한국교회 개혁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뼈아픈 자아비판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댓글
* 이메일이 웹사이트에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