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신사가 가난한 농부의 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농부는 너무 가난했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빚에 쪼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사가 방안을 둘러보다가 벽에 붙어 있는 유언장을 발견했습니다. 가까이 가서 읽어보니까 은행에 예금된 전액을 그 농부에게 증여한다는 내용입니다. 금액을 보니 농부가 빚을 다 갚고도, 일평생 편히 먹고 살고도 남는 큰 액수였습니다. 신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농부에게 왜 벽에다 붙여놓았냐고 물었습니다.
사연인즉슨 이랬습니다. 전쟁의 와중에 한 군인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기 집에 데려왔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정성껏 돌보며 치료해 보았지만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그 군인이 바로 그 유언장을 써놓고 죽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농부는 문맹자여서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뚫어진 벽지 위에 누더기처럼 붙여놓고 살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농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있나...” 하고 조롱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도 농부처럼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지 아니한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기를 좋아하는 분이십니다. 그 복은 하나님을 믿는 자, 하나님 안에서 사는 자,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유언장을 벽에 누더기처럼 붙여만 놓고 누리지 못하듯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믿음 없는 사람같이 살고, 하나님 안에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함 없이 산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맛보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삼상 12:15), 또한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삼상 12:25).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주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맹렬히 진노하고, 심판하고, 멸하기도 하는 분이십니다. 구원하는 하나님이자 멸하는 하나님이란 두 말씀의 주어가 모두 “너희”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오늘날에 적용하면 교회에 나오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곡식을 심어놓은 논밭에 알곡과 더불어 가라지가 있듯이 택함 받은 민족의 구성원 안에, 또 교회 안에도 구원받는 사람과 멸망에 이를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그렇게 두 부류의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여 섬기는 사람, 즉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뉘우쳐 떨쳐 버리는 사람, 유익하게도 못하고 구원하지 못하는 헛된 것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 행하신 큰일, 즉 구원해 주신 은혜를 잊지 아니하고 마음을 다하고 진실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에 순응하는 사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의 모습은 구원받은 사람의 증표입니다.
둘째, 택한 백성 안에 있고, 교회에 나가고 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사람, 늘 죄악 가운데서 살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뉘우침이 없는 사람, 유익하게도 못하고 구원하지 못하는 헛된 것들을 따르는 사람,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거부하는 사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공로를 의지하지 아니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의 모습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의 증표입니다.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b). 성령께서는 죄와 심판에 대하여 알려주시고(요 16:8), 진리를 전해주시고 구원을 위해 죄를 회개하도록 인도하십니다(요 16:13). 그렇게 성령님께서 알려주시는 것, 인도하심을 거듭 거부하여 마침내 마음이 굳어져 더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반응하지 않는 상태(딤전 4:2, 양심이 화인 맞은 상태)가 성령님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스스로를 용서받을 수 없고, 구원받을 수 없는 자리에 둡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막 3:28). 귀신 들려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입은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와 치유 받았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그와 같은 표현은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아, 곧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소문이 퍼져 바리새인들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예수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고 예수님의 치유 행위를 왜곡하고 부정했습니다. 즉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치부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거기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역사, 성령님의 역사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에 놓이는 것이며,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영원한 죄에 해당합니다.
말씀드린 두 부류의 사람 중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