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사는 길

잘 알려진 문학평론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해왔던 어느 모 교수가 서울 시내에 있는 한 교회에 초대를 받아 강의를 했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공언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그분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지 이유를 듣기 위해 초청했습니다. 아마도 교회와 성도들이 그분의 강의를 귀담아듣고 변화를 위한 도전을 받기 위한 의도가 있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초청받은 그는 자신이 미션 스쿨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이고, 산상수훈을 연구해 보았고, 잘 알고 있다 밝혔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산상수훈대로 사는 교인을 만나보지 못했고, 그것이 자기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만 잘할 뿐 실제 삶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강의 말미에서 "만약 여러분 중에 산상수훈대로 살고 있는 성도가 있다면 저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본 칼럼을 쓰면서 기독교의 위기가 목회자와 성도들의 신행(信行) 불일치(不一致)에 있다고 진단해 봅니다. 믿는 것과 사는 것이 별개라는 것입니다. 믿는 바가 일상의 삶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왔을 때는 믿는 사람인데 세상 삶의 현장에서는 믿는 사람으로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인격과 언행에 변화가 없습니다. 믿은 기간에 비례하여 더 독선적이고 고집스러워집니다. 믿음 없는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더 못합니다. 그와 같은 성도들의 모습은 자녀들이나 후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커다란 이유이기도 합니다. 기독교가 사는 길은 아주 단순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이 되게 하는 데 있고,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변화와 성숙에 있습니다. 

1978년에 사랑의교회를 개척하여 한국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이룬 고 옥한흠 목사께서 생전에 한국교회가 심각한 영적 질병에 놓여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너무 자기중심적이라 했습니다. 

수많은 성도의 기도가 자기중심적이고 세상 적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기를 원하는 기도가 빠져 있고,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달라는 기도,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해달라는 기도가 빠져 있고 온통 나와 내 가족만 잘되게 해달라는 자기중심적, 세상 적 기도가 넘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자기밖에 모르는 성도만 양산하게 됩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정작 복의 주체요 본질인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비본질의 것인 복에만 집착하는 본말이 전도된 기복주의 신앙, 세속화를 경계하고 떨쳐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해 주시리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고자 기도하고,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달라 기도하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해달라 기도할 때 교회의 필요, 나와 가족의 필요, 일터의 필요 등 이 세상의 필요는 자동으로 해결됩니다. 늘 가장 먼저 있어야 하고, 가장 먼저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 되면 이 세상에서의 필요는 자동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이 제시하는 아주 단순하면서도 핵심이 되는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안민 장로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너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고, 몹시 어려운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는 왜 이렇게 가진 게 없고 몹시도 어렵나요?”라고 새벽마다 눈물로 떼를 쓰며 물질의 복을 달라고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가난에 대한 서러움이 북바쳐 폭발하면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얼마나 크게 통곡했는지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나가는 사람마다 그의 속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위로하며 나갔습니다.통곡이 끝나자 어느새 학교 갈 시간이 되어 교회 문을 나서는데 “너가 가진 것을 내놔 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니 제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께서 찬양의 은사 주신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찬양하며 전도하고 병자들을 찾아가 위로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나병 환자들을 찾아가 찬양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고신대 교수가 되고 부총장까지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또 국내는 물론 전 세계 부흥 집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훌륭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기도를 하되 뭔가 자꾸 ‘주시옵소서’만의 기도가 아닌 이미 주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립니다’, 앞으로 주실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칩니다’라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응답을 주시는 주인공이 되게 해 주십니다.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그렇게 기도할 때 또한 신행(信行)이 일치할 때 기독교에 살길이 열리고,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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