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높이에 맞춘 삶

     정학진 목사의 [축복과 사명의 차이]라는 글입니다. “모야모야병을 앓고 있는 15세 소년의 투병기를 지켜보다가 울었다. 문득 건강한 것은 축복이 아니라 거룩한 부담이다. 사명임을 깨닫는다. 곰팡이 냄새 나는 지하교회 서너 명 교인이 전부인 셋방 교회에서 월세 내는 날을 두려워하는 미자립 교회가 존재하는 한 더는 예쁜 건물은 축복이 아니다. 부담이다. 사명이다. 뼈까지 달라붙은 쇠꼬챙이 같이 마른 몸을 하고 목마른 눈초리로 쳐다보는 아프리카 검은 대륙의 저 어린 것들이 있는 한 하루 세끼 꼬박꼬박 먹는 것은 더는 복이 아니다. 부끄러움이다. 잘 먹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할 일이 아니다. 잘 먹게 되어 죄송하다고, 우리만 잘 먹는 게 못내 죄송하다고 내가 가진 걸 나눌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평생 한 번도 설교 요청을 받아보지 못하고 부흥회 한 번 해보지 못한 동역자가 있는 한 더는 부흥회를 인도한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두려움이다. 빚을 지고 살아왔다. 이 빚을 갚기 위해 뼈를 깎아 보석을 만들고 훈련과 성실로 내 영혼을 맑게 헹궈야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가슴 아파 울고 있는 교우가 있는 한 더는 내 자식이 건강하게 자라는 게 복이 아니다. 남들보다 앞서고, 칭찬 거리가 많은 게 자랑이 아니다. 입 다물고 겸손히 그분의 은혜를 기억해야 할 일이다.” 

     세상적인 자랑이 부질없음을 그리하여 과감하게 내려놓게 하는 깊은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을 자랑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려주신 예수님과 예수님이 전해 주신 사랑과 구원의 복음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에게서 한 가지 특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자발적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을 하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고, 약한 자들에게 약한 자 같이 된 것은 어떻게든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 말했습니다. 연약한 사람의 약점을 괄시하거나 판단하기보다 덮어주고, 보호해 주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라 했습니다. 내가 타인보다 더 건강하다는 것, 더 많은 재물이 있다는 것, 무엇이든지 더 낫다는 것은 나보다 역약한 사람들을 섬겨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처신을 교육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눈높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다가갔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중심성의 본능,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의사소통이 잘 되고, 상대방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상대방의 마음을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높이에 맞춘다는 것을 몇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눈높이에 맞춘다는 것은 첫째, 공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유대인을 얻기 위해 유대인 같이 되고, 약한 자들을 얻기 위해 약한 자들처럼 되었다는 것은 내 관심사가 아닌 상대방의 관심사에 맞추었다는 것, 곧 공감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공감의 대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을 성육신(成肉身)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람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이 겪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친히 겪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실상을 완전하게 아십니다. 예수님이 사람 몸을 입었다는 것은 인간을 100% 아시고 공감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자기가 받은 사랑과 복음과 구원을 전해 주어야만 할 빚진 자라 했고,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눈높이에 맞춘다는 것은 둘째, 만나는 사람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으로 다가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빚진 자의 심정으로 다가가면 참으로 진정한 사랑으로 대하고, 존귀하게 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내 몸을 쳐 복종한다”(고전 9:27),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는 말들을 했습니다. 눈높이에 맞춘다는 것은 셋째, 내 몸을 쳐 복종시키고 죽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택함 받아 구원받았지만, 헛된 욕망과 죄와 유혹을 쫓으려는 나,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 것을 자랑하고, 교만하고, 혈기 부리는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쳐 복종시키고 죽어야 합니다. 자기 제어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가장 큰 역사 중 하나는 사람이 순화되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자신을 쳐 복종하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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