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랐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빨래하는 사람이 힘을 다해도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고, 광채가 났습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얼굴 모습까지 변화되었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을 수 있는 두 사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고 그들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지켜보던 세 제자 중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와 초막 셋은 골치 아픈 세상에 내려가고 싶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내놓는 것, 엿새 전에 예수님에게서 들었던 예수님의 죽음이 현실이 되는 것 등 그 모든 것이 싫다는 것이며,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예수님, 그리고 위대한 두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하는 크고 놀라운 영광을 누리기 원한다는 표현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도 변화산 위에다 초막 셋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지 않습니까? 골치 아픈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 싫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겁고 부담스럽습니다. 생명을 거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나도 여기와 초막 셋에 해당하는 탐욕을 채우는 현장, 향락의 현장, 대충 신앙생활 하는 영적인 나태함의 늪에 계속 거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라는 말이 끝나자 “구름이 몰려와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했습니다. 그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생명까지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세상 나라로 내려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기대가 이 세상 나라의 인간을 불쌍히 여겨 사랑하고 구원하시려는 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삶의 애환이 가득한 인간 삶의 현장 한 복판에 거하셨고, 삶의 애환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어루만지시고, 모든 질병을 고쳐주시고, 상한 심령을 위로해 주시고,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여기, 그리고 초막 셋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나만 만족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여기, 그리고 초막 셋을 지어 안주하는 것이 아닌 그것들을 넘어서서 문제 많고, 할일 많은 세상으로 내려가 영혼이 구원에 이르도록 구원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참되게 사랑하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는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예배, 성경 나눔, 봉사 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교회 문을 벗어난 이후부터, 읽던 성경책을 덮고 나서부터, 기도를 끝내고 일어나면서부터, 교회에서의 봉사 헌신을 마친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가족들과 친구들, 직장동료들과 지역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매일의 일상의 삶, 자고 먹고 일하고 노는 모든 삶에서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관심 갖고 기대하시는 하나님이 주목하는 산 제물이요 진정한 예배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가로서 장로교 탄생에 주된 역할을 한 존 캘빈(John Calvin)은 목회하던 교회의 주일 예배를 마친 후에 예배당의 문을 걸어 잠갔다고 합니다. 예배당 안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보고 찬송하는 것이 꼭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진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교회 문을 나서면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즉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여기, 그리고 초막 셋을 넘어서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가 완성되는 곳은 종교적인 예식이 행해지는 교회 건물 안이나 신비로운 체험이 있는 산 위에가 아니라, 늘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답답하고 지치게 만드는 가정, 일터, 지역, 사회와 국가 같은 치열한 삶의 현장임을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