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하게 하는 양식

사람들의 관심이 잘 먹고 잘사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날마다 매스컴을 장식하는 주제가 경제입니다. 정치인들이 입을 열었다 하면 경제를 살리겠다고 외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돈벌이 잘 되는 분야를 전공합니다. 교회는 예수 믿으면 잘 먹고 잘산다고 약장사처럼 외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잘 먹고 잘살고자 함이 썩을 양식을 위한 것인지 영생하게 하는 양식을 위한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임금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나라를 가장 잘 다스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적임자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세 아들을 불러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구해오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 말했습니다. 세 왕자는 가장 귀한 것을 얻기 위하여 뿔뿔이 찾아 나섰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큰 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망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때마침 첫째 왕자가 보물 하나를 구해 왔습니다. 그것은 나뭇잎을 부치기만 하면 그 나뭇잎이 군인이 되는 신기한 부채였습니다. 첫째 왕자는 그 부채로 많은 군사를 만들어 이웃 군대를 쉽게 물리쳤습니다. 온 백성은 신기한 부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환호했습니다. 왕위는 당연히 첫째 왕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후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물 부채로 인하여 인구가 많이 늘어나 식량 문제가 생겼습니다. 양식이 떨어져 굶주린 백성들은 금세라도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습니다. 그때 둘째 왕자가 귀한 보물 하나를 구해 왔습니다. 그 보물은 돌리기만 하면 하염없이 쌀이 쏟아져 나오는 맷돌이었습니다. 맷돌로 많은 쌀을 얻어 식량난을 깨끗이 해결했습니다. 백성들은 맷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 외쳤고 왕위 계승은 당연히 둘째 왕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라 안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식량난이 해결되니까 백성들이 게을러지고 방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남아도는 쌀로 술을 만들어 먹고는 취하여 서로 싸우고 음란과 향락을 일삼았습니다. 온 나라가 혼란하고 생지옥같이 되었습니다. 그때 셋째 왕자가 한 권의 책을 구해 왔습니다. 그 책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지혜를 주는 진리의 책이었습니다. 왕자는 그 책에 기록된 진리를 모든 백성에게 보급했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백성들이 점차 바른 생활로 돌아왔고, 근면하게 일하여 나라가 다시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 되었습니다. 왕은 셋째 왕자야말로 자신의 뒤를 이을 훌륭한 왕자라 생각하고 그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현재 모든 나라가 군사력 증강, 경제력 증강을 위해 무한 경쟁을 펼치고 있습니다. 앞에 전해드린 세 왕자 이야기는 군사력이나 양식에 해당하는 경제력보다 더 필요한 것, 더 중한 것이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 8:11),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물질의 풍요가 있다 할지라도 이 세상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부재하게 될 때 멸망이 도래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 서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고도의 문명과 누리는 물질이 유익이 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 형제입니다. 하루는 그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절하고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면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우편과 좌편에 앉도록 명해 달라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반문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열 제자가 분하게 여겼다 했습니다. 무엇이 썩을 양식입니까? 예수님이 통치하는 이스라엘 나라에서 우편과 좌편이라고 하는 높은 자리를 탐하고, 그것을 통해 부귀영화를 누리고, 명성을 얻는 것, 또 그와 같은 것을 명해 달라 한 것에 대하여 분하게 여기는 모습입니다. 반면 무엇이 영생하게 하는 양식입니까? 예수님께서 마시려는 잔인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길을 따라 손해와 고난을 감수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생하는 양식인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a). 헛된 것을 쌓느라 분주하고, 인생의 귀한 세월을 보내고, 인생의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 육신과 물질에 치우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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