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쉬어 가는 집

버킷 리스트(Bucket Li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해 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이런저런 후회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후회를 할 때가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서 있을 때라는 사실입니다.

한편 버킷리스트를 말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후회는 시간을 너무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작 시간을 써야 할 곳에 쓰지 않고, 쓰지 말아야 할 헛된 일에 너무 많이 썼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일한다고, 또 세상 것을 즐긴다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없었다는 것, 신앙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는 Sunday Christian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정작 붙잡아야 할 본질, 이루어야 할 본질을 멀리하거나 망각하고 살은 것에 대해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남단에 가면 초원에서 풀을 뜯으며 생활하는 ‘스프링복(Springbok)’이라는 영양이 있습니다. 이 영양 떼가 종종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서 학자들이 조사했습니다. 스프링복 영양은 식욕이 매우 왕성한 동물입니다. 뒤에 있는 영양이 앞에 있어야 풀을 많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빨리 달립니다. 그러면 앞에 있는 영양 역시 덩달아 빨리 달립니다. 목적은 풀을 많이 먹고자 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오직 경쟁하며 무작정 달립니다. 그 스피드가 시속 94km나 되어 치타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입니다. 앞에 절벽이 있는지, 바다가 있는지도 모르고 달리다가 떼죽음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와 같은 모습이 인간에게도 있습니다. 세계 사람들이 한국말 중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빨리빨리’입니다. 그런데 목적을 상실한 체 스피드를 내는 것은 스프링복 영양에게서 보듯 굉장히 위험합니다.

안타깝게도 잘 사는 선진국일수록 이혼율이 더 높고, 자녀들이 버림받고 문제아들이 넘칩니다. 미국의 중요 교단 교회 십대들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불신자 십대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명목상으로 기독교인일 뿐이지 실질적으로 세상 아이들과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 교육, 교회 교육, 성도들의 자녀 교육에 허점, 맹점이 있음을 말해주는 결과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에베소서 5장 16절의“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을 “시간을 사탄으로부터 다시 찾아 사 오는 것”이라 해석했습니다. 사탄은 시간의 영역까지 침투하여 삶을 혼란하게 만듭니다. 사탄은 시간이 제한 되어 있음을 알고 사람들을 조급하게 만듭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성취하게 하려고 욕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죽음이 시간의 끝이 아닌데도 사탄에게 속는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을 시간의 끝으로 오해하여 절망하게 하고, 두려워 떨게 만듭니다. 사탄에게 시간을 빼앗겨 버린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빼앗아간 시간을 되찾아 오는 것, 바른 믿음과 삶으로 시간을 다시 사 오는 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간 속에 살게 하셨지만, 그냥 흘러가는 시간에 휩쓸러 가지 않도록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과 시간은 영원한 삶과 시간의 서론입니다. 그렇기에 이 땅에서의 삶과 시간을 통해 영원한 삶과 시간을 잘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목회자를 위한 <리더십(Readership)>이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조국 한국의 <목회와 신학>과 같은 성격의 잡지입니다. 그 잡지의 편집장인 마샬 쉘리(Marshall Shelley) 목사가 간증한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의 아들은 매우 희귀한 유전질병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2분 만에 죽는 질병입니다. 1991년 11월 22일 오후 8시 20분에 태어나 22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들이 죽은 지 3개월 후에 두 살 된 딸마저 죽고 맙니다. 두 자녀가 그렇게 죽고 난 뒤 엄청난 충격과 상실감 속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 절규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이 아이들은 두 살 밖에, 혹은 22분밖에 살지 못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니다. 그 자녀들은 2년만, 혹은 22분만 살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것이다.”

그렇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 속에서만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영원 속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기독교 변증가인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가 재미있는 글을 썼습니다. “하늘 아버지는 이 세상의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종종 근사한 여관에서 쉬게 해주시지만 그곳을 고향 집으로 오해하는 것은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의 복을 상징하는 근사한 여관에서 쉴 수 있게 하시지만, 절대로 그곳이 고향 집이 아니라는 것, 잠시 쉬어가는 집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의 것,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양 살고, 매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댓글
* 이메일이 웹사이트에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