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자

공지영이라고 하는 여류 작가가 쓴「수도원 기행」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여류 작가는 작품에서 자신의 심경과 경험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류 작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 대목을 그대로 소개해 드립니다. “처음엔 소설가가 된다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그 다음엔 유명해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노력하는 가운데 나는 유명해졌다. 그 다음엔 당연히 돈 걱정이 없어지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생활비를 다 쓰고 나서도 통장에 늘 100만 원만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94년 여름, 내가 낸 세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러니 돈도 생겼다. 이제 100만 원이 문제가 아니라 하루를 자고나면 통장으로 수천만 원의 인세가 도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작품에서 여류 작가는 여러 가지 굴곡을 겪으면서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신앙의 회복을 통해 행복을 얻고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쩌면 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18년이었다. 18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다. 항복합니다, 주님, 하고 써 놓고 보니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항복과 행복, 획 하나 차이의 낱말이었다.” 이 여류 작가의 고백대로 획 하나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항복하면 인생의 모든 사슬로부터의 자유를 얻고,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피카소의 작품 중에 ‘황소 머리’라는 조각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값은 부르는 게 값이라 합니다. 그래서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이 작품은 피카소의 예술성과 독창성이 가장 잘 드러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하는데 이 작품의 재료가 되는 자전거는 피카소가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것이라고 합니다. 피카소는 그런 자전거를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예술작품으로 변화 시켰습니다. 이처럼 누가 손을 대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버림받고 아무 쓸모도 없는 쓰레기도 피카소가 공을 들여 작품으로 만들었더니 부르는 것이 값이 되었습니다. 피카소의 손만 닿아도 그토록 달라졌는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 인생에 닿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면 죄악으로 인하여 죽을 인생, 쓰레기 같이 버림받을 인생을 하나님께서 자유케 하시고, 존귀하게 들어 쓰시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 고난, 문제, 현상 등으로부터의 자유, 운명으로부터의 자유, 지옥의 권세,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구원 받은 후에 그와 같은 자유를 어떻게 누려 나가느냐가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갈 5:13에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 했는데, 육체의 기회라 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남용하여 죄 짓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유하면 마음대로 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른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이 있을 때에 그것을 뿌리칠 수 있는 것이 참 자유입니다. 죄에 대한 유혹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일어날 수 있고, 죄를 짓게 하는 상황이지만 유혹과 죄악을 떨쳐버림이 참된 자유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죄와 맞서 싸우는 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갈 5:1에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자인 동시에 종입니다. 율법과 죄와 사망에 대하여는 자유자이지만 하나님과 참된 사랑과 의를 위하여서는 종인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사랑과 섬김의 노예,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노예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주어진 자유는 자유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의 종노릇 곧 섬김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사랑으로의 종노릇 곧 섬김으로 나아갈 때에 진정한 자유자가 될 수 있고, 성숙해지고 열매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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